미주 한인사회의 대표적 기부자이자 세계 치과 재료 산업의 선구자인 서병인 비스코 명예회장이 지난 13일 오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본 기사는 뉴스매거진이 연출과 촬영, 제작으로 참여한 시카고한인문화원의 이민사 구술사(Oral History) 프로젝트에서 서병인 회장의 생전 인터뷰 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2024년 3월 15일 진행된 인터뷰어 김수현 전 아나운서와 서 회장의 커리어 및 삶에 대한 문답을 일부분이다.

Q. 미국에는 어떻게 오시게 되었습니까?
A. 이민으로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유학생으로 1964년에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화학과로 왔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 대한민국 형편으로는 자비로 미국에 온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장학금을 받아보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마침 서울의 미국대사관에서 미국 대학들의 추천 학생 선발 광고를 냈습니다.
시험도 보고 필기시험, 영어, 국사, 인터뷰까지 여러 차례 거쳤습니다. 1차, 2차, 3차, 4차까지 인터뷰했는데 마지막에 결국 안 됐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미국에서 원하는 사람은 학교 근무자였고 저처럼 충주 비료공장에 있는 사람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결국 스스로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미국대사관 도서관에 가서 학비가 비교적 저렴한 학교를 찾았고 캘리포니아 스테이트와 뉴욕 쪽 몇 주립대를 알아봤습니다. 결국 캘리포니아 스테이트에서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오게 됐습니다.
Q. 당시 미국에 오실 때 경제적으로는 어떠셨습니까?
A. 그 당시 한국에서는 외화를 50달러밖에 바꿔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상 가지고 나오는 것은 불법이었습니다. 그래서 50달러를 들고 왔고 중간에 조금 쓰고 나니 한 40달러 정도 남았습니다.
YMCA 호텔에서 며칠 묵으면서 10달러 정도 쓰고 남은 30달러로 겨우 한 달 아파트 월세를 냈습니다. 정말 딱 맞아떨어지는 수준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돈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이 참 놀랍습니다.
미국에 먼저 와 있던 친구에게 연락해 “가을학기에 가는 게 좋으냐, 봄학기에 가는 게 좋으냐” 물었습니다. 보통은 가을학기에 많이 오니까 당연히 그럴 줄 알았는데 친구가 봄학기에 오라고 하더군요.
왜냐하면 봄학기가 끝나면 여름방학이 3개월이나 있어서 그 기간 동안 돈을 벌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1월에 맞춰 봄학기로 입학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주 현실적인 조언이었습니다.
Q. 학비와 생활비는 어떻게 마련하셨습니까?
A. 첫 여름방학 때 식당에 가서 버스보이 일을 구하려 했는데 경험이 없다고 거절당했습니다. 그래서 유타에 있던 친구에게 전화를 했더니 네바다 위너뮤카 쪽 클럽 식당에서 버스보이 자리를 소개해줬습니다.
거기 가서 여름 내내 일하며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했습니다. 겨울방학 때도 돈이 필요해서 대학 친구 두 사람이 일하던 힐튼호텔 쪽 일을 소개받았습니다. 주말 밤샘 근무였는데 토요일 밤 11시부터 일요일 아침, 또 일요일 밤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하는 식이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그렇게 주말 잡으로 버티고 방학 때는 집중적으로 일했습니다.
장학금이 나올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은 그렇게 공부와 노동을 병행했습니다.

Q. 시카고에는 어떤 계기로 오시게 되었습니까?
A. 화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관련 업종 취업을 알아봤습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보다 시카고 쪽에 화학회사와 제조업 기반이 더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력서를 보냈습니다.
그 결과 시카고의 화학회사에서 오퍼를 받아 오게 됐습니다. 그때는 대학원을 나온 사람은 영주권 신청이 가능하던 시절이라 일을 하면서 영주권도 신청했습니다. 그때 연봉이 3만 달러 정도였는데 당시로서는 꽤 괜찮은 수준이었습니다.
Q. 치과 재료 분야로 들어가신 계기는 무엇입니까?
A. 제가 다니던 회사의 테크니컬 디렉터가 다른 회사로 옮기면서 저에게 따라오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회사가 시카고 다운타운 쪽의 치과 재료 회사였습니다.
1970년대 초에 들어갔는데 마침 치과계에서 완전히 새로운 재료가 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사장이 “이런 제품을 만들어볼 수 있겠느냐”고 묻더군요. 그 안에 들어가는 핵심 원료 하나가 당시 시중에서 구할 수 없었습니다. 초창기라 판매 자체가 안 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합성을 했습니다. 회사에서 처음부터 합성해 1년 반 만에 제품을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이 제가 치과 재료 제조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게 된 시작점입니다.
Q. 창업은 언제 결심하셨습니까?
A. 한 10년 정도 회사 생활을 하다 보니, 40대 초반쯤 되면서 “평생 남 밑에서 일할 것인가, 내 사업을 해볼 것인가”라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몇 달 동안 깊이 고민했더니 아내가 눈치를 채고 무슨 일이냐고 묻더군요.
제가 “가족이 있는데 창업했다가 실패하면 어떡하느냐”는 걱정을 털어놓았더니, 아내가 “당신 생각대로 해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3년 동안은 책임질 테니 3년 안에 성공만 하면 된다고 용기를 줬습니다. 그 한마디가 결정적이었습니다.
퇴사할 때 경쟁금지 조항에 서명한 것이 있었습니다. 시카고 100마일 이내에서는 1년간 같은 업종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캘리포니아의 한 회사에서 1년간 컨설팅을 했습니다. 그 기간이 지나 1981년에 다시 시카고로 돌아와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결국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비스코’의 시작입니다.
Q. 비스코를 세계적으로 성장시킨 핵심 기술은 무엇이었습니까?
A. 제가 회사를 나올 당시 치과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치아와 금속 양쪽에 모두 붙는 접착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3~4년 동안 집중 연구를 하면서 결국 치아에도 붙고 금속에도 붙는 기능성 모노머를 찾아냈습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접착제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연구 과정에서 전자현미경이 꼭 필요해 15만~20만 달러짜리 장비를 직접 샀습니다. 비싼 장비였지만 그 덕분에 표면 구조를 정확히 보고 접착 메커니즘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Q. 세계적 혁신 제품, 올본드(All-Bond)는 어떻게 탄생했습니까?
A. 1989년쯤입니다. 기존 접착 개념을 완전히 뒤집는 말 그대로 ‘패러다임 시프트’를 가져온 제품이 올본드였습니다.
당시 두 가지 다른 개념을 하나로 결합해 전혀 새로운 시스템을 만든 것입니다. 저는 마케팅을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자금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학자들과 임상의들이 사용해보고 효과를 인정하면서 자연스럽게 세계로 퍼졌습니다. 독일, 프랑스 등에서 직접 전화가 오고 해외 판매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 제품이 비스코를 폭발적으로 성장시킨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지금은 90개국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Q. 연구와 저술 활동도 활발히 하셨지요?
A. 연구를 많이 하면서 논문도 많이 발표했고 결국 접착제 원리를 집대성한 책도 썼습니다. 영문판이 2013년에 나왔고 중국어, 한국어 등으로도 번역됐습니다.
지금도 접착제 원리를 그렇게 자세히 설명한 책은 거의 그 책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Q. 부인은 어떻게 만났습니까?
A. 시카고에 와서 감리교회를 찾았고 그 인연으로 아내를 만났습니다. 친구 집 저녁 식사 자리에서 지금의 아내를 처음 봤습니다. 간호대 출신이었고 아주 계획적으로 소개된 자리였지요.
제가 세계를 다니며 강의하고 국제학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아내 덕분입니다. 아이들 돌봄, 교육, 한글학교, 교회 활동까지 거의 모두 아내가 맡았습니다. 그래서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Q. 기부를 통한 사회 환원 철학은 무엇인가요?
A. 제 경험상,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사회가 기회를 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정 부분은 반드시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뜻에서 재단도 만들었고 한국과 미국 여러 대학에 기부도 했습니다. 유능한 인재를 키우는 것이 결국 사회 전체를 발전시키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Q. 젊은 세대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A. 기회는 항상 지나갑니다. 다만 준비된 사람만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조급해하지 말고,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정해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준비해야 합니다.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무엇이든 좋아하는 것을 깊이 파고들다 보면 어느 순간 기회가 옵니다.
저는 늘 젊은 학생들에게 “준비하라, 그러면 기회가 보인다”고 이야기합니다.
Q. 마지막으로 인생을 돌아보시면 언제가 가장 행복하셨습니까?
A. 의외로 미국 와서 학교 다니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습니다. 돈은 없었지만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었고, 배움 자체가 즐거웠습니다.
그 이후 사회생활은 너무 바쁘게 지나갔습니다. 저는 원래 편안함만 즐기는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늘 바쁘게 살면서 짧은 세월을 의미 있게 쓰고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제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렇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잘 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병인 회장의 구술사 인터뷰는
시카고한인문화원의 유튜브 영상을 통해 시청할 수 있다.

